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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서구화와 기독교 수용의 주역들(8) 기독청년운동 이끈 월남 이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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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익명 작성일 07-0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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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개신교는 1880년대 영국과 미국의 선교사들을 통해 수용됐다. 기독교가 수용되던 초기 20여 년 동안은 주로 상인·여성·농민·몰락 양반 등 서민층이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반면 당대를 주도하던 양반 관료들과 명문대가 출신들은 여전히 기독교를 경원시하며 유교 성리학을 고수했다.
그러나 1900년대 전후로 양반 관료들과 명문대가 출신들도 대거 기독교를 수용하기 시작했다. 1900년대 전후로 한성감옥에서 기독교를 수용한 이승만·신흥우·이상재·이원긍·유성재·김정식·홍재기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1904년 집단으로 출옥한 그들은 개교회(個敎會) 입회, 황성기독청년회(YMCA) 가입, 미국 유학 등을 통해 한국 기독교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근대민족운동을 선도하기 시작했다.
특히 이상재는 다소 늦은 나이인 54세가 되던 1903년 기독교로 개종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출옥 후 YMCA의 지도자가 된 1905년부터 세상을 떠난 1927년까지 20여 년간 한국의 기독청년운동을 선도하면서 상동교회의 전덕기 목사와 더불어 근대민족운동을 이끈 대표적인 기독교 계통 인물이었다.
이상재는 여러 면에서 전덕기 목사와 대비됐다. 우선 출신에서부터 둘은 너무 달랐다. 이상재는 고려 말 삼은(三隱)으로 유명한 목은 이색의 후손으로서, 본인 자신도 고관대작을 역임한 양반 관료 출신이었다. 반면 전덕기 목사는 서울의 가난한 서민 출신이었다. 또한 전덕기 목사는 10대 어린 나이에 기독교를 수용했지만, 이상재는 50세가 넘도록 유교 성리학을 고수하다가 54세에 한성감옥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기독교를 수용한 후 신앙생활도 이상재와 전덕기는 아주 대조적이었다. 서민 출신인 전덕기는 남대문의 상동교회에서 주로 서민들과 더불어 신앙생활을 했다. 반면 양반 관료 출신인 이상재는 출옥 후 양반 교회로 유명한 연동교회에서 주로 양반 출신들과 더불어 신앙생활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재와 전덕기 목사는 기독교를 통한 근대민족운동을 이끌었다는 점에서는 같았다. 특히 이상재는 YMCA를 통해 청년층과 양반층에 기독교를 확산시키고 나아가 근대민족운동도 이끌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평가를 받을 만하다.
이상재는 1850년생으로 1875년생인 전덕기 목사나 이승만 초대 대통령보다 25년 연상이다. 고향은 충남 서천군 한산면이고, 호는 월남(月南)이다. 이상재는 18세이던 1867년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에 왔다가 낙방하고, 친척 소개로 박정양의 식객(食客)이 됐다. 박정양은 근왕적(勤王的) 성격이 강한 개화파 관료, 즉 왕당파 관료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박정양의 깊은 신임 얻고 승승장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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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월남 이상재.
조선시대 식객이란 유력인사의 집에 얹혀살며 이런저런 일을 돌봐주는 사람을 지칭하는데, 18세의 이상재는 박정양의 개인 비서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상재는 식객 노릇을 14년 동안 하면서 박정양의 깊은 신임을 얻었다. 그 인연으로 이상재는 박정양과 정치적 운명을 함께하게 됐다. 1881년 박정양이 신사유람단 일원으로 일본에 가자 이상재는 수행원 자격으로 함께 갔다. 그때 홍영식·윤치호·유길준 등과 친분을 쌓으면서 개화파 관료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887년 박정양이 초대 주미공사로 미국에 갈 때는 서기관 자격으로 따라갔으며, 귀국 후에는 우부승지·학무국장·내각총무국장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1896년 7월 서재필이 독립협회를 결성하자 가입했으며, 1898년에는 독립협회 부회장이 돼 회장 윤치호와 함께 만민공동회를 주도하기도 했다.
이처럼 박정양의 후원으로 승승장구하던 이상재는 1902년 6월 16일, 이른바 ‘유길준 쿠데타 사건’에 연루돼 둘째 아들 이승인과 함께 체포됐다. 유길준 쿠데타 사건이란 일본에 망명 중인 박영효·유길준 등이 조선의 민영환·박정양과 더불어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는 음모사건을 지칭한다. 이 음모사건에 등장하는 주동자 유길준·박정양 등이 이상재와 가까운 인사들이기에 이상재가 체포됐던 것이다. 김정식·이원긍·유성준·홍재기 등 이상재와 함께 독립협회 활동을 벌였던 인사들도 그때 체포됐다.
당시 이상재·이승인·김정식 등은 경위원(警衛院)에서 두 달 정도 조사를 받은 후 8월 하순 한성감옥으로 이감됐다. 한성감옥은 조선시대 전옥서(典獄署)였는데, 북쪽의 청사 건물과 그 남쪽 그리고 서쪽의 죄수 건물로 구성돼 있었다. 남쪽의 죄수 건물은 남간(南間), 서쪽의 죄수 건물은 서간(西間)이라고 했는데, 이상재는 남간에 수감됐다.
그 한성감옥의 서간에서 이상재는 1903년 가을쯤 기독교로 개종하게 됐다. 결정적인 계기는 한성감옥에 설치돼 있던 서적실(書籍室) 즉 감방 도서관에 비치된 성경과 기독교 서적들이었다. 한성감옥의 서적실은 이상재보다 먼저 한성감옥에 수감됐던 이승만이 만들었다. 이승만은 자신이 한성감옥의 서적실을 만들게 된 과정을 ‘옥중전도(獄中傳道)’라는 글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 다행히 본서장(本署長) 김영선씨와 간수장 이중진씨가 도임한 이후로 옥정도 차차 변해 진보한 것이 많거니와, 총명한 아이들을 교육할 일로 종종 의론하다가 작년 음력 9월에 비로소 각 칸에 있는 아이 수십 명을 불러서 한 칸을 치우고 ‘가갸거겨’를 써서 읽히니, 혹 웃기도 하고 혹 흉도 보고 혹 책망하는 자도 있는지라. (…) 작년 예수 탄신일에 우리도 다행히 구속하심을 얻은 사람이 돼 기쁜 정성도 측량 없거니와 만국 만민의 영광스런 명일을 옥중에서도 처음 경축하는 것이 또한 용이치 않은 기회인고로, 관원과 죄수들이 우연히 수합한 돈이 뜻밖에 수백 량이 된지라. 다과를 예비하고 관민 사십여 명이 모여 즐거이 경축할 때 그 지낸 예식은 다 말할 수도 없으며, 이날 오전에 벙커 목사께서 예물을 후히 가져오고 위로차 오셨다가 모인 아이들을 보고 대단히 기뻐하며, 매 주일날에 와서 가르치기를 작정하며 관원들이 다 감사히 치하했으며 서적실을 실시해 죄수들로 하여금 임의로 책을 얻어 보게 하려 하매, 성서공회에서 기꺼이 찬조하며 오십 원을 위한(爲限)하고 보조하기를 허락해 사백 량 돈을 들여 책장을 만들고 각 처에 청구해 서책을 수합해 심지어 일본과 상해의 외국 교사들이 듣고 서책을 연조한 자 무수한지라. 영어·국문·한문의 모든 책이 지금 있는 것이 250여 권인데 처음 15일 동안 책 본 사람이 268인요, 지난달은 한 달 동안 모두 249인이라.(…)” (이승만 [옥중전도] ‘신학월보’, 1903년 5월)
감방 개조한 서적실서 기독교 ‘열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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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4월 7일 이상재의 사회장. 선생의 유해를 실은 마차가 종로4거리에서 남대문 서울역 쪽으로 향하고 있다.
이승만은 1898년 윤치호와 이상재가 주도하던 만민공동회에서 열렬하게 활동하다가 1899년 1월 체포됐다. 한 달 정도 병영에 수감됐던 이승만은 2월 1일 한성감옥으로 이감됐다. 당시 사형수였던 이승만은 어느 날인가 [신약성경]을 읽다가 배재학당 시절 들었던 설교말씀 즉 ‘너의 죄를 회개하면 하느님께서는 지금이라도 너를 용서하실 것이다’라는 구절이 떠올랐다고 한다. 그때 이승만은 ‘오, 하나님! 제 영혼을 구원해주시고 우리나라를 구해주시옵소서’라는 기도를 올렸는데, 그 순간 마음의 평안이 찾아와 기독교 신자가 됐다고 한다.
한편 위에 등장하는 본서장 김영선은 1900년 2월 한성감옥 서장으로 부임했는데, 그는 간수장 이중진과 함께 엄비의 사람들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이승만의 장모인 박씨가 1879년부터 1882년까지 4년 동안 입궁해 엄비의 침모(針母)로 일했었다. 그런 인연으로 엄비는 이승만에게 관심을 기울였으며, 한성감옥 서장 김영선과 간수장 이중진 역시 이승만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그런 김영선과 이중진에게 이승만은 감옥의 아이들을 위한 학교설립을 제안해 1902년 9월 남간의 감방 하나를 개조해 옥중 학교로 개설했던 것이다. 1903년 크리스마스 때 벙커 목사가 위문차 한성감옥에 왔다가 옥중 학교에 감동해 자신도 일요일마다 찾아와 가르치겠다고 자원했다. 그 기회를 이용해 이승만은 벙커 목사에게 옥중 학교 학생들뿐만 아니라 어른 죄수들을 위해서도 옥중 서적실이 꼭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그 제안에 크게 감동한 벙커 목사가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함으로써 서적실이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벙커 목사가 마련해 보낸 서적들을 바탕으로 한성감옥의 감방 한 칸을 서적실로 개조해 1903년 1월경 옥중 도서관이 탄생했다. 개관 당시 서적실에는 성경과 기독교 관계 서적들 250여 책이 비치됐고, 그후 장서가 꾸준히 늘어 1904년에는 500여 책에 이르렀다. 수감자들은 서적실에서 자유롭게 대출할 수 있었으며, 심지어 이능화나 이동녕 같은 외부 인사들까지도 대출할 수 있었다.
대출할 때는 ‘도서대출부’에 대출 책명·대출일·대출자 등을 기록하고 반납할 때는 반납일도 기록했는데, 대출 책임자는 물론 이승만이었다. 서적실의 도서대출 업무는 이승만 등 죄수 중 유식자(有識者)들이 담당했다. 이승만은 서적실이 설치된 1903년 1월부터 5월까지 서적실 책임자로 있었다. 이승만은 이 서적실에서 성경반을 운영하기도 했다.
그런데 1902년 8월쯤 이상재 등이 수감됐을 때는 아직 서적실이 설치되기 전이었다. 서적실이 설치되기 이전 이상재 등이 한성감옥에서 어떤 생활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기왕의 죄수들과 비슷한 생활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1903년 1월 서적실이 설치되면서 이상재 그리고 함께 수감된 동지들은 열성적으로 독서했다. 그들은 성경반에도 참가해 이승만과 함께 성경도 공부했다. 이렇게 성경과 기독교 교리서들을 읽던 이상재는 1903년 가을쯤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됐다. 이상재는 자신이 어떻게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됐는지를 ‘성서공회에 보내는 편지(與聖書公會書)’라는 글에서 이렇게 밝혔다.
“세상에 우연은 없다… 하나님은 존재하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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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송재 서재필.
“사람들이 예기치 못했던 재앙을 만나거나 예기치 못했던 기쁜 일을 만나면 곧 ‘자연이다’ ‘우연이다’라고 말하고는 특별히 그 까닭을 탐구할 줄 모르는데 그래도 좋은가? 우연이라는 것은 애초에 그렇게 기획해 운영하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됐음을 말하는 용어다. 자연이란 것은 형체도 없고 자취도 없는데 그렇게 됐다는 뜻이다. 세상에 어찌 형체와 자취가 없고 경영하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되는 일이 있을 것인가? 자연이나 우연이 사람들로 하여금 재앙으로 여기고 기쁜 일로 여기게 함은 반드시 그 이치가 없는 것이니, 반드시 천지 만물을 창조하고 만 가지 이치를 운용하는 대주재(大主宰)가 있는 것이다. 사람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사이에 묵묵히 계획하고 드러내어 영화롭게 한 다음에야 그 처음이 처음 되고, 그 마지막이 마지막 될 수 있다. (…)”(이상재, 성서공회에 보내는 편지[與聖書公會書])
‘성서공회에 보내는 편지’는 한성감옥에 책을 보내준 성서공회에 보낸 감사편지다. 이상재는 1903년 1월부터 서적실의 책을 읽기 시작했다. 6월부터는 아예 이승만을 대신해 서적실 책임자가 돼 1904년 1월까지 그 직책을 유지했다. 아마도 이상재가 서적실 책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명성과 나이에 더해 이승만의 배려가 더해졌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승만은 감방 학교 수업, 성경반 운영 등으로 분주해지자 이상재를 믿고 서적실 책임자로 추천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렇게 서적실 책임자가 된 이상재는 더더욱 열심히 성경과 기독교 교리를 읽다가 신앙으로까지 진전돼 성서공회에 편지를 보냈을 것으로 이해된다. 당시 이원긍·김정식·홍재기 등도 성서공회에 편지를 보내 감사함을 표하면서, 자신들이 서적실의 책을 읽고 어떻게 신앙을 갖게 됐는지를 고백했다.
‘성서공회에 보내는 편지’에 따르면 이상재는 세상에 우연히 또는 자연히 일어나는 일은 없다는 가정에서 창조주 또는 섭리자가 반드시 존재한다는 결론 즉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이 결론에 따라 이상재는 기독교 신앙에 귀의하게 됐다. 요컨대 이상재의 기독교 신앙은 성령 체험 같은 신비 체험 결과가 아니라 치열한 학습과 논리적 탐구의 결과였던 것이다.
기독교 신앙을 수용하기 이전 이상재는 평생에 걸쳐 유교 성리학을 공부했다. 그래서 이상재의 세계관과 가치관은 유교 성리학에 근거해 있었다. 유교 성리학의 세계관 또는 가치관은 이른바 천명(天命)이라고 하는 논리에 집약돼 있고, 그 천명은 음양오행(陰陽五行)으로 표현됐다. 그것을 [중용]에서는 ‘천명을 성(性)이라고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고 한다(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고 선언했다.
그동안 유교 성리학자로서 이상재는 세상일을 천명과 음양오행에 입각해 이해했었다. 예기치 못한 재앙 또는 기쁜 일이 있으면 그것은 곧 음양오행의 원리에 따른 자연 또는 우연이라 이해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자신을 비롯한 동지들이 나라의 주권을 위해 분투하다가 감방에 갇혔는데, 그것이 자연의 이치이고 또 천명이란 말인가’라는 질문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나라의 형편 그리고 고종 나아가 백성을 생각하면 별로 좋아질 희망이 보이지도 않았다. 이런 일들이 그저 천명에 따라 자연히 또는 우연히 일어난 것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이상재의 삶과 조국의 현실이 너무나 절망적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음양오행의 작용으로 우연히 또 자연히 일어난 현실이라면 미래 희망을 기약하기도 어려웠다. 따라서 유교 성리학의 천명 또는 음양오행에만 갇혀 있을 경우, 이상재의 현재와 미래는 절망과 분노로 가득 찰 수밖에 없었다. 나라를 이렇게밖에 다스리지 못하는 고종에 대한 절망과 분노, 자신들을 감방에 몰아넣은 정적들에 대한 절망과 분노, 그리고 자신들을 알아주지 않는 백성들에 대한 절망과 분노는 결국 이상재를 절망과 분노로 몰아넣어 죽음에까지 이르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상재는 성경과 기독교 교리를 접했고 전혀 다른 세계관과 가치관을 알게 됐다. 즉 ‘회개’와 ‘하나님’이란 세계관과 가치관이었다. ‘회개’란 자신에게 닥치는 재앙이나 불행이 외부 요인 즉 자연이나 우연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죄악’ 때문임을 깨닫고 죄에서 벗어나는 것이요, ‘하나님’이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창조주와 섭리자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양반들 중심 연동교회서 세례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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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단 초기 YMCA 야구단. 그들은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팀과 교류전을 펼치기도 했다.
이상재는 한성감옥에서 성경과 기독교 교리를 읽으면서 바로 그 ‘회개’와 ‘하나님’이라고 하는 기독교 원리를 깨달았던 것이다. 그것을 이상재는 ‘성서공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정동 성서공회에서 수백 종류의 신학문의 서적을 제공해 국문과 한자로 된 책들이 차례로 갖춰져 있는 만큼 비로소 눈을 붙여 울적함을 배제할 수 있었고, 계속해 잠심(潛心)해 탐구하기를 하루 이틀 하니 깊이 빠져들어 마치 물이 점점 젖어 들 듯, 자기 마음을 스스로 묻고 자기의 죄를 스스로 인정해 뚜렷이 어떤 사상과 이념을 깨달으니, 이전과 같지 않음이 다소 있었다”고 고백했다.
즉 이상재는 기독교의 ‘회개’와 ‘하나님’을 알기 이전에는 모든 것을 천명으로 돌리고 그러면서 모든 허물과 원망을 외부에 돌렸는데, 성경과 기독교 교리를 읽으면서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욕망·죄악 등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런 발견은 자신이 감방에 갇힌 허물은 하늘이나 정적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깨달음으로 귀결됐다.
그런 깨달음은 마음속 가득한 절망과 분노를 없애버리기에 충분했다. 절망과 분노가 사라진 감방은 지옥이 아니라 그 자체가 복당(福堂)이었다. 이런 깨달음을 통해 1903년 가을쯤에 이원긍·김정식·홍재기·유성준 등도 또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됐다.
이상재·이원긍·김정식 등은 러일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04년 4월 석방됐다. 석방 직후 이상재는 정동제일교회를 찾아갔지만 거부됐다. 이상재는 이승만을 통해 신앙을 받아들였고, 이승만은 아펜젤러의 배재학당에서 공부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동제일교회에서는 정치색이 강한 이상재가 등록할 경우 정치적 분란이 생길 것을 우려해 거부했던 것이다.
이에 이상재는 게일 선교사가 시무하는 종로의 연동교회로 가서 등록하고 세례를 받았다. 당시 연동교회는 주로 양반들이 출석하는 교회로 알려져 있었으며, 장로교 소속이었다. 이상재와 함께 김정식·이원긍·홍재기·유성준 등도 등록하면서 연동교회는 크게 부흥해 서울을 대표하는 장로교회로 성장하게 됐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이상재를 비롯해 이원긍·김정식·홍재기 등이 1904년 YMCA에 단체로 가입해 주도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YMCA는 1903년 10월 28일 정동 유니온클럽에서 창설됐다. 하지만 시작은 독립협회가 강제 해산당한 1898년 연말부터였다.
독립협회가 강제해산당하고 지도자 서재필이 미국으로 출국해 버리자 남은 회원들은 새로운 구심점을 요청했다. 새로운 구심점은 독립협회처럼 정부 탄압에 쉽게 와해당하지 않을 조직이어야 했다. 그러려면 국제연대가 가능한 조직이라야 하고, 그런 조직은 당시 현실에서 YMCA가 유일했다.
1844년 6월 영국의 조지 윌리엄스가 청년들의 정신적·영적 상태의 개선을 목표로 시작한 기독청년회운동은 1900년대 세계적인 조직으로 성장해 있었다. 당연히 그런 YMCA 조직을 한양에도 만든다면 정부 공권력도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란 기대가 남은 회원들 사이에 있었다.
이에 따라 1898년 연말 독립협회 출신 청년 150여 명이 언더우드 선교사의 집으로 가서 YMCA 창설을 제안했다. 이 사실을 언더우드 선교사는 “150명의 상류층 청년이 YMCA의 설립을 요청하는 진정서에 서명했는데, 그들 중 하나가 현재 한성판윤입니다”라고 증언했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증언한 ‘현재 한성판윤’은 민영환의 아들 민경식이었다.
1903년 10월 28일 정동 유니온클럽에서 창립된 YMCA의 의미에 대해 헐버트는 다음과 같이 역설했다. “청년들에 대해 Y는 무엇을 의미할 것인가? 먼저 Y는 그들이 서로 만날 수 있는 장소가 되게 하며, 두 시간씩 담화하거나 더욱이 여러 가지 책을 읽게 함으로써 꿈과 서광을 보게 할 것이다. 그들에게 운동하고 목욕할 수 있는 장소가 되게 할 것이다. Y는 그들에게 역사·과학·종교 문제를 강의해줌으로써 스스로 향상할 수 있는 자극을 줄 것이다. 그리고 Y의 모든 목표는 사람들을 불러들여 그들에게 고상한 토론을 할 기회를 마련해주는 데 있다.” 그에 따라 YMCA는 청년들에게 교제의 장, 독서의 장, 운동의 장, 목욕의 장, 토론의 장을 제공함으로써 한국 청년들의 정신적·영적 각성을 추구할 것임을 밝혔다.
한국 청년들의 정신적·영적 각성 촉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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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협회 회장과 서울 YMCA 부회장직을 역임했고 개성에 한영서원을 설립했던 한국 감리교계의 지도자 윤치호.
최초의 YMCA 이사진은 13명으로 구성됐는데, 그중 11명은 외국인이었고 겨우 두 명만이 한국인이었다. 즉 초기의 YMCA는 외국인이 주도권을 가진 조직이었다. 하지만 1904년 들어서면서 이상재·남궁억·윤치호·이채연·김규식·이원긍·김정식·홍재기 등이 가입하면서 YMCA의 주도권은 한국인에게 넘어오기 시작했다.
뒤이어 1905년 이상재가 YMCA 교육부 위원장을 맡으면서 독립협회 출신들이 대거 교육 실무를 맡게 됐다. 이상재와 독립협회 출신들은 YMCA를 전국조직으로 확대하고 성경공부·신학문·실업교육·토론회·강연회 등을 강화함으로써 기독청년운동과 근대민족운동을 선도하게 됐다. 이런 상황은 서재필이 창립했던 독립협회가 YMCA를 기반으로 부활한 모양이나 같았다.
이런 사실에서 1905년 이후의 이상재는 상동교회의 전덕기 목사와 더불어 1884년 김옥균의 갑신개화운동, 1895년 개화파의 갑오개혁운동 그리고 1896년 이후 서재필의 독립협회운동을 기독교 조직을 발판으로 계승·발전시킨 기독청년운동의 선도자이자 근대민족운동의 선도자라 평가할 수 있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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